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호의 난 (문단 편집) == 과정 == 목호 진압을 위해 편성된 고려군의 수는 25,605명으로 이들이 타고 갈 전함 314척은 모두 [[왜구]]에게서 빼앗은 전함이었다. 진압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들도 하나같이 고려의 고위 관료들이자 동시에 무장으로서의 경력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 양광전라경상도통사(楊廣全羅慶尙都統使) - [[최영]](당시 문하찬성사) * 도병마사(都兵馬使) - [[염흥방]](당시 밀직제학) *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 이희필(상원수, 당시 삼사좌사), [[변안열]](부원수, 당시 판밀직사사) *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 - 목인길(상원수, 당시 찬성사), [[임견미]](부원수, 당시 밀직) *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 [[지윤]](상원수, 당시 판숭경부사), [[나세(조선)|나세]](부원수, 당시 동지밀직사사) *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 겸 서해도순문사(西海都巡問使) - 김유(당시 지문하사)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의 토벌군은 공민왕 앞에서 출정식을 치렀는데 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8월에 [[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에서 군사들의 규율을 정했는데, 여기에는 '''제주 사람으로서 하치에 가담해 관군에 맞서는 자들은 가차없이 쳐 죽인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도군|진도]](珍島)를 출발한 뒤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기까지 보름 사이에 역풍이 부는 등 기상 여건도 안 좋고 서해도순문사 김유의 할당 전함 1백 척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영은 벽파진의 검산곶에서 대기하려 했지만 다른 장수들이 보길도에서 배를 띄워 추자도로 향하는 바람에 최영도 뒤따라 출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함선 상당수가 크게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8월 28일에 고려군은 명월포(明月浦)[* 지금의 한림해수욕장 부근. 과거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나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여몽 연합군의 좌군도 모두 이 곳에 상륙했다.]에 도착했고, 이곳에는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가 이끄는 기병 3천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실 최영은 우선 전임 제주목사 박윤청[* 앞서 제주목사로 왔을 때 선정을 펼쳐서 제주도민들에게도 나름 신망이 높았다.]을 보내 탐라의 성주와 왕자를 회유하는 한편 목호들에게도 말을 바치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목호들이 최영이 보낸 공민왕의 교지를 찢어버리고 앞서 제주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이하생을 죽이는 것은 물론, 최영이 상륙시킨 배 11척에 타고 있던 고려군도 몰살시켜서 저항하자 최영도 별수없이 협상을 포기하고 진압에 나선다. 이때 군사들이 진군하지 않으려 하자, 최영은 마지막 수단으로 휘하 비장(裨將) 한 명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목을 베어 조리돌려 보였고 그제서야 군사들이 해안에 상륙해 목호와 전투를 치렀다. 30리까지 추격해 들어간 고려군은 목호들의 말을 모두 빼앗아 기병대를 양성했으며, 명월포를 시작으로 어름비[* 지금의 [[애월읍]] 어음리. 새별오름에 올라서 서북쪽 방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너른 벌판이다.], 밝은오름,[* [[한림읍]] 상명리 북서쪽에 있는 오름. 근처에 느지리오름이 가까이 있으며 검은데기오름이 있는 금악리에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보인다. 느지리오름과는 달리 밝은오름 자체는 사유지라 들어가 볼 수는 없다고.] 검은데기오름[* 지금의 한림읍 금악리 뒤쪽에 있는 오름. 멀지 않은 곳에 이시돌 목장이 위치해 있다. 간간이 오름에서 말을 방목하거나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방면에서 밤낮으로 전투를 치르고 일단 명월포로 돌아왔다. 이때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 목호 지도자들은 고려군을 상대로 도전하면서 새별오름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것이 유인책임을 간파한 최영은 군사를 몰아 급히 추격했고 수세에 몰린 목호들은 연래(延來)와 홍로(烘爐)를 거쳐 [[서귀포]](西歸浦) 남쪽의 [[범섬]][* 지금의 제주 [[올레길]] 7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각진 모양의 섬이 범섬이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듯. 서귀포항에서 섬 가까이 가는 유람선도 운영한다.범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정마을]]이 있다.]으로 달아났다. || [[파일:서귀포범섬사진.png|height=200]] || || 범섬 전경 || 이에 최영은 빠른 배 40척을 모아 범섬을 포위하게 한 뒤 정병을 거느리고 범섬으로 들어갔다. 제주 올레길 7코스에는 또 '''배염줄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붙은 곳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에 대해 범섬으로 달아난 목호를 진압할 당시 최영이 배를 모아서 쇠사슬로 잇고 범섬까지 닿는 배다리를 놓도록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이 밖에 최영이 군을 주둔시킨 법환포구에는 '''막숙'''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자신의 세 아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고려군에 항복했고,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저항하다가 벼랑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을 모두 허리를 베어 처형하고, 벼랑에서 자결한 나머지 두 목호 지도자의 시신도 찾아내 목을 베어서[* 고려사 최영 전의 기록. 다만 이문에서는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 관음보 세 사람 모두 자결했다고 되어 있다.] 지병마사 정룡을 시켜 수급을 개경으로 보냈다. 남은 무리들은 초무해서 양민으로 편입시키려 했는데, 최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달아난 목호 석다시만(石多時萬) ·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 105명이 다시 동아막을 거점으로 농성하였다. 하지만 최영은 이들마저도 격파하고 도망치는 목호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고 한다. 그 다음 최영은 목호들을 쳐부수고 거둔 [[전리품]] 가운데 말 1,700필 중 774필은 현지 관인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고, 금패(金牌)와 은패(銀牌), 인신(印信)은 제주의 고려 관원과 탐라의 성주, 왕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머지 말을 가지고 9월 22일에 명월포를 출발한 고려군은 화탈도(火脫島)에서 역풍이 불어서 명월포로 회항, 다음날 다시 출항해서 추자도에 도착했으나 풍랑 때문에 10월 5일에야 추자도를 출발해 [[소안도]], [[보길도]], 진도 등지를 거쳐 11월 3일에야 [[목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배에 실은 말 가운데 93필이 풍랑으로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